[에바자크] 겨울바다
예전에 유하님과 한참 풀었던 썰...ㅠㅠ...
사실 뒷 이야기도 조금 써놨는데 도저히 그 뒤를 쓸 의욕이 안나서 우선 앞에만 올립니다.
손 시려 보여. 신경 쓰여.
너무나도 평온한 목소리의 에바리스트가 작은 상자와 함께 건넨 말이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를 열어보니 내용물은 평범하게 생긴 가죽장갑이었다. 평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메이커로 치장한 그를 생각하면 분명 적은 돈을 들인 물건은 아닐 것이었으나 그의 센스 치고는 비교적 눈에 띄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고맙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손에 끼고 흔들어 보이는 아이작을 보며 에바리스트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이후 에바리스트가 손이 비어있을 때마다 장갑의 행방을 물었으므로 아이작은 매일 같이 가방에 선물 받은 장갑을 챙겨 넣어야 했다. 꼼꼼치 못한 그에겐 꽤 귀찮은 일이었지만 선물 받은 쪽으로서는 불만을 이야기 하진 못했다.
오늘도 아이작은 놓고 갈 번한 장갑을 부랴부랴 챙겨서는 끼지도 못한 채 양손에 쥐고 달려 나왔다. 갑작스레 집 앞까지 찾아와 차를 대고 기다리는 에바리스트 덕분이었다.
“왜?”
“아니, 너 이거 고속도로잖아.”
“고속도로지.”
“어디 가는 건데?”
“일찍도 묻는다.”
그들의 드라이브는 언제나 멋대로 질주하는 에바리스트의 뜻에 따라 행선지가 결정 됐다. 보통은 학교, 혹은 음식점, 또는 쇼핑에 따라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유별난 행사가 있다면 미리 이야기 해주는 편이었기에 아이작은 오늘도 별 다른 질문을 하지 않은 채 푹신한 조수석에 몸을 맡긴 채 주변 경관 구경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딘가 멀리 나가는 건가 싶긴 했지만, 정신을 차리니 에바리스트의 차는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있었다.
“좀 돌아가는 거야. 자고 있어.”
“아, 그러니까 어디 가는데.”
“드라이브 삼아 돌다 갈 거니까 자둬. 어차피 오래 걸려.”
에바리스트는 불만을 말하려는 아이작의 조수석 시트를 뒤로 젖혀 버렸다. 무게 중심을 등에 대고 있던 아이작이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곧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포기한 모양이었다.
시트 위에 널브러진 아이작이 편히 잘 수 있도록 에바리스트는 틀어 두었던 클래식 음악의 음량을 살짝 줄였다. 낮아진 악기의 음색 위로 친우의 옅은 숨소리가 이어졌다.
차가워진 겨울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평일 대낮인 탓인지 기나긴 도로를 주행하는 차는 에바리스트의 것뿐이었다.
차체에 부딪치는 바람 소리와 은은히 흐르는 오케스트라의 연주.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친우의 뜻 모를 잠꼬대. 에바리스트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만족스럽고 평화로운 드라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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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놈! 또라이 같은 놈! 망할 놈아아아!”
얇은 코트 한 장을 어떻게든 몸에 더 밀착 시키려는 것인지 아이작은 양 손으로 코트 끝을 잡고 몸의 안쪽으로 세게 말아 들고 있었다. 분명히 비슷한 수준의 방한 채비임에도 왜인지 너무나도 침착한 에바리스트가 그의 옆에 섰다. 아이작이 못내 아쉬운 듯 길가에 세워놓은 그들이 타고 온 차를 힐끔힐끔 바라봤지만 에바리스트는 개의치 않고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잔잔한 바람에 낮은 파도가 느긋한 템포로 모래사장에 부딪쳐 내렸다. 멀리 펼쳐진 수평선이 맑은 하늘 덕에 겨울 바다라고 믿을 수 없이 푸르른 색을 띄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날카로운 바닷바람이 폐부를 쿡쿡 쑤셔왔다. 정신이 번쩍 드는 감각에 상쾌함마저 느끼고 있는 참이었지만, 아이작은 에바리스트의 뒤를 따르며 연신 자신이 할 수 있는 각종 욕을 바다를 향해 마음을 담아 퍼붓고 있었다.
“그렇게 싫어? 꽤 예쁘잖아. 기분전환도 되고.”
“싫다.”
“그럼 데려오지 말 걸 그랬군.”
“미리 말해줬으면 아마 싫다고 했을 거야.”
“그럴 것 같아서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결국 내 의사는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산이었다면 절대로 메아리가 돌아왔을 커다란 목소리로 아이작이 불만을 내뱉었다. 툴툴 거리며 소리 질러 대는 것 치고는 차로 돌아갈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 나름대로 겨울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물놀이라도 하러 왔어? 뭔가 용건이 있을 것 아냐.”
“딱히. 시간이 남았을 뿐이라.”
“…한가해서?”
“아까부터 질문뿐이라 답하기 귀찮아지기 시작했어.”
“내가 언제 질문만 했어?”
“톨게이트에서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지지 않는 에바리스트를 뒤로 두고 아이작은 파도 앞으로 뛰어나갔다. 파도가 들어왔다 나가는 것을 박자 맞추어 따라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결국 박자를 놓쳐 구두위로 차가운 바닷물이 쏟아져 내렸다. 비명을 질러대면서도 그만둘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발을 연신 놀려댔다.
언제보아도 지루하지 않은 녀석이다-에바리스트는 그의 모습이 끼어든 겨울 바다를 감상했다.
파도 소리와 하모니를 이룬다고 느낄 정도로 오래 지속되던 그의 행동이 갑작스럽게 멈춰들었다. 발등 위로 겨울 바다의 차가운 바닷물이 반복해서 덮여 왔지만 그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바다를 향해 서있었다. 난리를 피워 댄 탓인지 발갛게 상기된 얼굴의 그가 에바리스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남 손 시려 보인다고 장갑씩이나 사주고는, 그런 너는 맨손이냐.”
“나는 추위를 타지 않는 편이니까.”
“하여간 한마디를 안 져요.”
아이작이 장갑을 벗어 에바리스트의 손에 가져다 댔다. 두어번 꾹꾹 찔러도 반응이 없자 그의 손을 들어 올려 악전고투 끝에 손에 끼워 보였다. 장갑에 남아 있는 온기에 에바리스트가 곱은 손을 쥐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무 일도 없어.”
“그런 식으로 혼자서 삭히지 말고.”
에바리스트는 느긋하게 코앞에 선 그와 주변의 경관을 감상했다. 바다의 색이라면 그의 눈동자와 닮았을까 했지만, 겨울 바다의 어두운 빛으로는 영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에바리스트는 한숨을 쉬고는 손을 뻗어 아이작을 끌어안았다. 차갑게 식은 몸이 밀착되어 붙었다.
“고마워. 걱정하게 했구나.”
“야, 아. 야, 잠깐.”
“고맙다. 아이작.”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같이 다니기에 괜찮은 외모라고 생각했고, 그 이외의 이유는 그다지 없었다. 시키는 대로 자신의 말을 듣는 것도 좋은 요소였다. 의외로 머리도 잘 돌아가는 편이라, 길게 말을 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일을 해낼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가까운 친구이자, 약간은 이성적인 이유가 가미된 관계. 친애는 있지만 그것의 종류는 에바리스트에게 있어 한없이 비즈니스 적인 것에 가까웠다. 그것이 조금은 다른 무언가가 되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내 참.”
한참을 안겨 있던 아이작이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마주 끌어안자마자 고개까지 어깨에 파묻어버린 에바리스트 덕에 잠시 몸을 움츠렸다. 아이작은 한숨과 함께 그의 뒤통수를 힐끔 바라봤다.
의외의 모습에 약간의 안도감이 스쳤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이지 못할 만큼 감정표현이 적은 에바리스트였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이제야 겨우 마음을 열었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무슨 힘든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안이라도 될 수 있다면. 아이작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에바리스트가 고개를 들고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서로에게 닿아 있던 온기가 떨어져 나가자 급격히 체온이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이작은 그제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 큰 사내 둘이 겨울 바다의 백사장에서 온 힘껏 끌어안고 있는 장면은 누가 봐도 이상할 것이 틀림없었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아이작이 얼굴을 두드려 대며 흘린 소리에 에바리스트가 피식 웃었다.
돌아오는 길은 무척이나 불편했다. 오는 길 내내 잠을 자댄 탓인지 제대로 잠도 오지 않았고, 대화를 나누기엔 왜인지 불편함이 느껴졌다. 아이작은 불편한 공기를 잊으려 눈을 감고 계속 잠을 청했다. 그 결과 잠은커녕 옆에 있는 에바리스트가 움직이는 자잘한 소리에만 정신이 집중되었을 뿐이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는 아이작의 손을 에바리스트가 운전 도중 살짝 감아쥐었다.
몸을 튕겨내며 일어난 아이작이 잠시간 뒷머리를 긁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밥이라도 사줄까?”
“오늘 따라 이상하게 친절 한데. 스키 타러 간다고 돈 모으고 있던 것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정말로 아무 일 없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아니 그러면 이 손은 뭔데. 아이작은 목 끝까지 올라온 소리를 눌러 참아냈다. 그 에바리스트 바르트가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날이었다. 될 수 있는 한 받아 줄 수 있다면 받아주고 싶었다. 다 큰 남자 간의 민망함 등은 잠깐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아이작은 도리어 에바리스트의 손을 세게 쥐고는 정면을 바라봤다. 아이작의 집도 얼마 남지 않았다. 차라리 마주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덜 부끄러웠다.
에바리스트는 아이작의 집 앞에 도착할 때쯤이 되자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놓아 줄 때쯤에야 한손 운전은 위험하다든가 하는 불평정돈 해도 됐단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조심해서 들어가.”
“어, 응. 너도 잘 들어가라.”
“그래.”
아이작의 거처는 작은 원룸이었다. 오밀 조밀 모여 있는 원룸촌의 한가운데에 쓸모없이 덩치만 큰 에바리스트의 차를 오래 세워둘 수도 없는 터라 오래 대화는 할 수 없었다. 시동도 끄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지켜보던 아이작이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대화를 위해 열어 놓았던 창틀의 끝에 손가락을 걸어 고개를 들이밀었다.
“야, 진짜 말 안 할 거야?”
“뭘.”
“너 집에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아니면 여친한테 차였냐?”
“반복해서 말하지만, 아무 일도 없어. 그리고 여자 친구라면 약 반년 전에 헤어졌어. 정확히 몇 월 며칠이었는지까지 말해줄까?”
“아니 그거야 나도 알지. 왜 그 부분에서 성질을 내는 건데. 너랑 나랑 얼마나 오래 알고 지낸 사인데 그렇게 굴어.”
있는 대로 찌푸린 얼굴의 에바리스트에게 아이작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힘든 일 있으면 말해줘. 듣기라도 할 테니까.”
“없어.”
“왜 그렇게 고집 부리는데.”
창틀에 팔을 괸 아이작이 그대로 고개를 박았다. 친구의 노란 정수리가 에바리스트의 눈앞에서 푹 꼬꾸라졌다. 겨울바람에 흐트러진 채 정돈되지 않은 아이작의 머리카락을 에바리스트가 손가락으로 슬슬 쓸어내렸다.
“너는 너무 생각이 많아. 정말로 아무 일도 없어. 그냥 너와 바다가 보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고집부리니까 그렇잖아. 애 취급 하지 말라고.”
“고맙다는 뜻이니까, 얌전히 받아.”
머리카락 틈으로 보이는 귓불이 추위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새빨갛게 달궈져 있었다.
“우와아아아!! 에바리스트 짜증나!”
“소리 지르지 마.”
“싫다!”
“애 같긴.”
아이작은 손바닥으로 차 문짝을 여러 번 두드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몸을 일으키는 틈으로 보인 표정은 미미히 미소 지은 얼굴이었다. 그는 툴툴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꼽고 어슬렁어슬렁 건물의 현관에 발을 디뎠다. 한손만 들어 흔들어 대는 것이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는 요량이었다.
“아이작.”
“…….”
“언제나 고맙다.”
에바리스트는 돌아보지 않는 아이작의 등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작지만 단호한,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였다. 아이작은 흔들어 대던 손을 그대로 뒷머리에 가져다 대고는 에바리스트가 정돈해 놓았던 머리를 다시 엉망으로 만들어댔다. 곧 아이작은 뛰어 들어가듯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계단을 밟는 소리가 현관문을 타고 밖까지 들릴 정도로 커다랗게 울렸다. 에바리스트는 소리의 여운마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느긋한 손길로 버튼을 눌러 창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