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의 아이들 패러디북 샘플
Ⅰ
어두운 수풀 사이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산 짐승일 것이 틀림없음에도 말고삐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앞에서 말을 이끌고 있던 란지에가 내 쪽을 힐끔 바라봤다 재빨리 시선을 앞으로 되돌렸다. 내가 긴장해 있는 것을 그도 눈치 채고 있는 것일까.
주변의 경광을 살피는 것 마냥 눈알을 굴리다 벨노어 백작의 등에서 그 시선을 멈추었다. 짧은 템포로 흔들리는 백작의 등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가족의 나들이. 그런 황당한 이름을 붙여 나온 이 행사가 나에게, 그리고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내 아버지가 될 수 없고 나는 그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서로가 그 사실 하나 만큼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 했건만. 그는 대체 내게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오빠, 오빠. 뭘 그리 생각하세요?”
로즈니스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해사하게 웃는 작은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망아지 위에서 꽤나 익숙한 모습으로 말을 모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지 당당함 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것도.”
“이렇게 날이 좋은데 어째서 그런 찌푸린 얼굴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시간을 내주시는 날은 흔치 않아요.”
왜 이리 나에게 잘 해주는 걸까. 게다가 예의바른 존댓말.
잠시 고민을 하고 있던 나에게 로즈니스는 간단히 해답을 쥐어 주었다. 이 아이는 아버지와의 시간이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다. 보통 바쁜 아버지가 시간을 내어 주신다면 그것은 무척이나 기쁜 일이 될 것이다.
로즈니스의 좋은 기분 외에도 나는 한 가지 답을 더 얻을 수 있었다. 벨노어 백작은 내 아버지가 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사실이었다.
바보 같은 생각에 고개를 털고 조금 말을 빨리 몰아 나갔다. 뒤쳐진 로즈니스가 뭐라 투덜댔지만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밑에서 방향을 잡아 주던 란지에가 조금 빨라진 걸음으로 말의 옆을 지키며 걸었다.
“도련님, 말을 멈추겠습니다.”
“도착한 건가?”
“주인님께서 멈춰 서셨습니다. 옆으로 가시겠습니까?”
“…가지 않아도 괜찮아?”
“예. 저는 당신의 명령을 먼저 수행할 뿐이니까요.”
란지에는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여기 있을게.”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가 붙잡고 있던 고삐를 당겨 놓게 했다. 벨노어 백작은 언덕 위에 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얼 보는 것일까 싶어 그의 어깨 너머를 보자 잔잔히 지는 태양의 모습이 보였다. 화려한 백작의 붉은 망토 위로 황금빛의 석양이 부서져 떨어져 내렸다.
“보리스.”
“…예.”
“내가 무리라도 시켜 버린 건가? 안색이 좋지 않구나.”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라는 것은 이런 존재였을까. 벨노어 백작은 언제나 나직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눈의 높이를 맞춰 날 위해 몸을 수그려 주고는 했다. 경계하는 날 비웃기라도 하는 걸까. 언제나 옅은 미소를 입술에 걸친 채였다. 아니, 알고 있다. 그의 모습은 다정함-이라는 것이었다.
“늠름해졌구나. 검이 아주 잘 어울려.”
“그렇습니까.”
“그래. 무척이나 남자다워졌단다. 처음 왔을 때는 네가 검을 잡을 수 있을지도 조금은 불안했었지.”
“…죄송합니다.”
백작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란다. 내가 그런 걸 말하려던 게 아니야. 네가 무척이나 믿음직스러워졌다고 말이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백작…….”
“아버지라고 부르렴.”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와는 달랐다. 언제나 나를 내려다보고, 형의 바지자락을 붙잡던 나를 비웃었다. 눈물 흘리는 나를 다그쳤다. 커다란 손으로 뺨을 쳤다. 무얼 배우던 늦깎이였던 나를 비웃고, 경멸하고, 최후에는 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 아버지에게서 날 지켜주던 형에게도 버려졌다.
그러니 지금 나는 혼자 남아 버린 것이다.
하지만 벨노어 백작은 달랐다. 내게 손을 내밀어주고, 나의 눈을 마주하고, 다정한 미소로 나를 받아 들였다. 1년의 계약이라는 이름 위에 어찌 이런 친절을 얹어 주는 것일까.
“―아버지.”
“정말로 이 검이 잘 어울리는 구나. 맞춰 온 보람이 있어.”
백작의 손이 검 끝에 닿았다. 허리에 단단히 매어 둔 롱소드가 흔들려왔다. 나의 검. 내 힘.
윈터러.
나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여겨 내 죽음과 함께 사라져야 할 검. 형이 내게 준 목숨. 책임. 그래. 형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지켜 준 것이다. 나는 혼자 남지 않았다. 윈터러가 함께 하고 있었다. 한순간이라도 믿었던 월넛 선생에게 빼앗겨 버렸지만…….
“놔!”
그와 월넛은 무엇이 다른가. 다정한 목소리, 따스한 손길. 나를 아껴주는 말들. 대체 무엇이 그와 벨노어를 가른단 말인가.
“놓으란 말야!”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 그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는 살아남아 다오, 보리스.
나의 대지는 언제나 겨울. 온 지면을 덮은 눈에 꽃송이는 묻혀 사라져 버렸다.
Ⅱ
“보리스 도련님!”
맨 처음의 그를 만났을 때에는 작고도 조그마해서, 동갑이라는 말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여리고 작은 목소리로 내 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해 올 때에는 어찌 그리도 작게 말하는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명령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가 시중 받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는 것 뿐 일까.
그런 그나마한 다행 틈에도 그는 쉬이 시종을 부리지 않는 편에 속했다. 내가 그의 뒤에 서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는 타입이었다.
가끔 입을 열어 부탁해 오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작아서 내가 그를 무시하는 판이 되어 버린 적도 상당히 많았다. 자신을 무시하는 무뚝뚝한 시종. 그가 가진 나에 대한 이미지는 사나흘 만에 그리 정착해 버린 듯 했다. 이래보여도 싹싹하게 구는 연기에는 익숙해져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상당히 애석한 일이었다.
“어디계십니까! 돌아오십시오!”
그래, 그저 애석한 일에 불과했다. 그가 나를 믿지 않는 것은 그다지 놀라울 일이 아니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현명하기까지 했다. 어린 아이가 혼자서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경계하고 맘을 놓지 않는 것은 정답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는 고사하고 그의 양아버지가 된 백작마저 그의 편이 아니었다. 편은 고사하고 그의 것을 약탈해 갈 적이었다.
나는 그의 미묘한 적개심을 그런 제반의 이유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도련님!”
벨노어 백작은 가족과의 나들이라며 도련님과 아가씨를 대동해 산행에 나섰다. 이용하기 위해 보리스 진네만을 자신의 품에 끌어 들여 놓고는 마치 진짜 가족처럼 구는 것이 역겨웠다. 아마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주변을 크게 경계하고 있는 그가 마음을 놓게 하기 위해서겠지. 이곳은 안전하다고. 나의 품은 안전하다고.
그는 보리스 진네만이 기댈 사람을 필요로 하는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평화도 잠시. 백작이 우연히 도련님의 검에 손을 대자 상황은 급변했다. 그 검은 그가 그리도 애지중지 하던 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소리를 지르고는 말에 올라타 달려 사라져 버렸다.
그가 갑작스레 빠른 속도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잡고 있던 고삐마저 놓친 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보리스를 놓친 백작은 노발대발 하며 말의 고삐를 잡고 있던 나를 질책해 왔고, 한가로이 산행을 즐기던 시종 일행들이 모두 풀려 산을 뒤지는 일에까지 이르렀다.
“보리스 진네만!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대답해!”
❇ ❇ ❇
“도련님!”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자 산 속은 순식간에 어둠으로 가득 차 들었다. 다행이 백작 역시 위험하다는 것을 느껴 대부분의 시종들을 데리고 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나만은 처분이 달랐다. 보리스를 찾아 함께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면 다시는 성 안에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벨노어 백작 가에서 나오는 일은 그다지 큰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그 안에는 란즈미가 남아 있었다. 간신히 치료를 받아, 상처에서 벗어나가고 있는 연약한 란즈미가 혼자 남아 있었다. 이를 악물고 비에 젖어 사라져 가는 말굽 자국을 따라 달렸다.
이런 복잡한 길이라면 어린 아이인 보리스로서는 그다지 멀리가지 못 했을 것이 뻔했다.
“대답해 주십시오!”
목이 쉬어 가는 것인지 처음과 같은 커다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앞길을 두드리던 비는 거세지기만 해 발자국은커녕 길이 어느 쪽인지 판별 하는 것마저도 어려웠다.
“도련님!”
다른 말도 섞지 않고 그저 도련님 이라고 커다랗게 반복해 소리친다. 악에 받친 내 목소리에 겁이라도 먹고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그가 닿지 못할 곳 까지 이미 나아가 버린 것인지 보리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서로 엉겨 뒤엉켜 가는 옷에 우선 조끼를 벗어 바닥에 던져 버렸다. 시종에게 옷이 자주 배급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괴로운 맘이 더 급했다.
“아…….”
얼마나 걸었을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이에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보리스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잊고 몸을 던져 뭔가가 움직이는 곳으로 향했다.
말이었다. 보리스가 타고 갔던 말이 발을 절뚝거리며 바위 그늘로 들어가고 있었다. 몸 이 곳 저 곳에 자잘한 상처가 가득한 것이 아무래도 어딘가에서 넘어져 굴러 버린 것만 같았다.
말이 넘어졌다면 혹시 그는 낙마하여 크게 다쳐 버린 것은 아닐까. 혼절해 내 목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어딘가에서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지 않을까.
“신이시여…….”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그의 모습을 주변에서 찾았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혹여나 풀 숲 사이에 흩어져 있을까 꼼꼼히 주변을 살폈다.
얼마나 헤맸을까. 정신이 몽롱해질 참에야 보리스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 반, 원망하는 맘 반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제야 내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련님.”
쉰 소리 섞인 목소리로 근처까지 다가가 그를 부르자 보리스가 눈동자만을 굴려 내 쪽을 바라봐 왔다.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발목을 끌어안은 채였다. 괜찮으냐는 말을 입에 담기도 전에 보리스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앉아 계십시오.”
그의 몸을 끌어안아 고정시키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근처의 바위 밑으로 데려갔다.
“미안해.”
“조금, 더 기대셔도 괜찮습니다.”
“너도 피곤해 보이니까. 말도 안 되는 폐를 끼쳐 버렸어.”
“아신다면 좀 더 기대 주십시오. 걷기 불편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옅은 웃음소리가 계곡 아래로 흩어져 내렸다.
이 비는 언제까지 내리는 것일까. 한숨을 쉬면서도 보리스를 찾았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조금 풀어져 내렸다.
“어떻게 됐어?”
“…별일은 없었습니다.”
“너, 혼나지 않았어? 말의 고삐를 잡고 있던 건 너였으니까.”
“없었습니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발목이 아픈 것일까. 얼굴 한가득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편하게 앉힌다면 조금 나을 것 같았지만 좁은 바위 그늘 밑에서는 그마저도 힘들었다.
자리를 조금이라도 내어 주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팔로 몸을 지탱 시켰지만 바위 이끼에 미끄러져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밀어 넣고 엉덩이만 적당히 움직여 그가 앉을 자리를 늘려 주었다.
“돌아가야 합니다.”
“알고 있어.”
“어째서 그러셨던 겁니까. 주인님께서 많이 당황해 하셨습니다.”
“…….”
물기가 바위를 따라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등 뒤로 흐르는 물방울이 차디찼다.
“그는 내 아버지가 되려했어.”
벨노어 백작은 현재 그의 아버지였다. 1년간의 계약이더라도 현재는 보리스 다 벨노어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의 아들로서 지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는 듯 입에 담았다.
“다정한 목소리에, 따스한 손길. 동생이 생겨서 기뻐. 나는 언제나 지켜지기만 하던 어린 아이였으니까. 이번엔 내가 지켜줄 수도 있는 거야―하고 행복함을 느껴.”
“…….”
그는 소중하게 붙들고 있던 칼을 세게 검어 쥐어 품으로 끌어 당겼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핏기 없던 손이 더 하얗게 변해 버릴 정도였다.
“너는 백작을 믿을 수 있어?”
의외의 질문에 순간 대답이 늦어 버렸다.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저의 주인이시니까요―하고 입에 발린 대답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답한다. 그가 내 쪽을 눈동자를 굴려 힐끔 향했다가 다시 앞을 내다보았다. 바위뿐인 계곡의 틈이지만 그의 눈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보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을 위해 물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에게 내 속내를 드러내야 할 이유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나는 강해 질 거야. 형이 준 보물을 지키고, 살아남을 거야.”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백작을 믿지 않아.”
말하는 동안 흘러내려 버린 장검을 다시 끌어 올려 품에 안아 들었다. 그 검은 상당히 고급스런 롱소드였다. 어린 아이도 쓸 수 있도록 길이와 무게를 조절 하고, 힐트에 벨노어의 문장을 새겨 넣은 주문품이었다. 그가 소중히 안고 왔던 검과는 판이하게 다른 화려한 검이었지만, 그는 마치 그 검이 같은 것이라는 것 마냥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지킬 거야. 내 소중한 것을 모두 지킬 거야.”
형이 준 보물. 그 한 마디가 슬그머니 머리 한구석에 자리 잡혀 앉았다.
“그 검이 형이 준 보물인가요?”
“…….”
그는 고개를 내려 검을 한번 내려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검이 아냐.”
“그렇다면 어째서 벨노어의 손을 거절하셨습니까.”
별 것 아닌 질문을 하는 것처럼 딴청을 피우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호칭을 잘못 했다는 것을 입 밖에 내놓은 다음에야 깨달았다. 내 말실수 때문인지 한참 동안 그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에 뜸을 들이는 걸까 싶었지만 곧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머리가 내 쪽으로 휘청 한번 크게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도련님!”
“아, 미안해.”
부축하려는 내 손을 거절한 채 그는 몸을 뒤로 밀어 바위에 기댔다. 물기 어린 바위에 그의 긴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엉켰다.
“미안해.”
“몸이 많이 불편하시다면, 이곳에 계십시오. 제가 나가 다른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 오겠습니다.”
“따뜻해서.”
그의 손이 내 소매를 잡아들었다. 손목에 살짝 닿은 그의 손가락이 물방울 보다 더 차서 순간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내 움직임에 쓰게 웃은 그가 조용히 손을 바닥으로 내렸다.
“너무 따스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오니까. 착각하고 말았어.”
“도련님.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닌데. 내 아버지가 아닌데!”
“진정하십시오.”
“나에게서 또 뭐든지 빼앗아 버릴 걸 알고 있으면서!”
시선이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동자가 이 곳 저 곳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양 손을 들어 결국 자신의 눈을 가렸다. 손바닥 밑으로 물방울이 흩어져 사라졌다.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야, 형.”
“도련님!”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인지 그는 반복해서 헛말을 해대고 있었다. 보리스의 이마에 손을 가져 대자 뜨거운 감각이 손바닥 가득 전해져 왔다.
그는 내가 찾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이곳에 있었다. 비를 피하지도 못한 채 발목을 끌어안고 그대로 계곡 한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계속 움직이며 몸에서 열을 내고 있던 나도 이렇게 체온이 내려가 버렸는데 그가 멀쩡 할리가 없었다.
“백작은 내 가족이 될 수 없어. 로즈도 내 동생이 될 수 없어.”
“보리스.”
“그런데 왜 다들 다정한 거야. 왜 나를 흔들리게 하는 거야. 전부 가짜라는 걸 알고 있는데, 왜 당신들을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방금 무의식에 그를 거절했던 내가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뜨겁게 달궈진 몸에 무언가 복받쳐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목이 메고 아프다. 시리고 뜨거웠다. 흘러내리는 감정에 몸을 맡기고 그를 강하게 품으로 끌어들였다.
“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겁니까.”
“이름을 들었어.”
“이름?”
내 품에 안겨 있던 그가 마주해 나를 안아 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사람의 온기에 나도 모르게 기운이 빠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너 나를 보리스 진네만―이라고 불러 주었잖아.”
“도련님.”
“방금도 보리스라고 불러 놓곤.”
“…실수 입니다.”
보리스의 목소리가 목께 에서 부서져 내렸다. 옅고,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목소리로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이대로 그가 입을 다물어 버리면 내 품속에서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응, 그래. 실수 인거야. 그래도 기뻤어.”
“…….”
“나는 벨노어가 아니구나. 가족이 아니 구나-하고. 그러니까. 배신당해도 괜찮아. 나는 괜찮아.”
필사적인 말에 나도 모르게 그를 잡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그는 약하다. 너무나도 약하다. 나는 그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그를 현명한 소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감성적이고 연약한 소년을 나는 나와 같이 감정을 포기해버린 존재라고 멋대로 결정지어 버렸었다.
“이렇게나 다정한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
끌어안은 손을 그대로 들어 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쓰다듬는 대로 길게 숨을 내뱉은 그가 그대로 내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나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아. 나는 절대로, 당신을 배신하지 않아.
그런 말이 입에 담기는 것을 필사적으로 눌러 참고 그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내렸다.
“다리는 괜찮으십니까.”
“응.”
“그렇지 않다고, 말씀해 주세요.”
“응?”
그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몸이 가볍게 저려 왔다.
“안 그러신다면 저는 당신을 혼자 두고, 도움을 구하러 가버릴 생각 입니다.”
“…너무해.”
“허세를 부리신 대가입니다.”
웃음소리가 어깨 맡에서 작게 들려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팔을 내 등 뒤로 둘러 깍지 껴들었다.
“란지에.”
“예. 말씀 하십시오.”
“음―”
이번에는 내 쪽이 웃어 버릴 차례였다. 하지만 슬쩍 웃음을 삼켜 버렸다. 지금 웃어 버린다면 아마도 그는 지금 하려는 말을 삼켜 버리고 말테니까.
“으음. 꼭 말해야 하는 거야?”
“예. 도련님께 생긴 문제를 제가 보기만 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으으음.”
신음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얼굴 한 가득 웃음이 들어차 버리고 말았다. 다행이 소리까지 내진 않아 그가 눈치 채진 못한 모양이었다.
“…아파.”
“예?”
“엄청나게 아파. 혼자서는 무서워.”
“그렇습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약한 소리를 들었다. 다정한 형이 된 것처럼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친애의 감정을 담아 그의 머리께에 내 볼을 가져댔다. 볼에 닿는 그의 차가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내 품에서 벗어나 날 마주 봤다. 순간 적으로 사라진 온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식어 내리는 어깨에 안타까움이 몰려 왔다. 섭섭해 하고 있는 내 앞에 그가 조용히 자신의 얼굴을 가져댔다.
“같이 있어 줘.”
맞닿은 이마가 무척이나 뜨거웠다. 속삭이는 숨소리 한 가득, 불안과 안타까움이 들어차 있었다.
그 불안을 조금 이라도 줄여 줄 수 있다면. 나와 너무나도 다른 너를, 약하고 어린 당신을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다. 나는 알고 있을 터였다.
“예. 도련님.”
나는 그와 똑같아. 그와 똑같은 평범한 어린 아이일 뿐이다. 그의 말에 흔들리는 것은 그저, 그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나와 같이 불안해하고, 헤어짐에 상처 받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당신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 ❇ ❇
눈꺼풀을 두드리는 햇살에 어렵사리 잠에서 깨어났다. 무거운 눈두덩을 들어 올려 눈앞을 확인했다. 어제 밤 그리도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멈춰 있었다. 몸이 일으켜 지지 않아 고개를 들어보니 가슴팍에 도련님이 머리를 대고 잠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어쩌다 잠이 들었더라. 분명 비가 오고, 무언가 대화를 했던 것이 기억나지만 자세한 것이 희뿌옇게 무언가에 가려진 것 마냥 떠오르지 않았다.
“…….”
무얼 이야기 했더라. 어쩌다 이런 모습으로 잠들었던 거지. 하나씩, 하나씩 떠올려 본다. 비교적 맑게 기억하고 있던 그를 찾아냈을 때부터- 이어져 내려와 그를 끌어안고 달래 주었을 때까지.
‘제가 당신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대체 무슨 낯 뜨거운 소리를 뱉어 버린 것인가. 아무리 감정에 휩쓸렸다지만 저런 말까지 해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에게 느껴오던 묘한 호감이 동질감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 판에 밖으로 그것을 표출하기까지 하다니.
나도 모르게 보리스를 밀쳐 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위벽에 대충 기대어진 그가 일어나지 않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것인지 이정도 움직임으로는 일어날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보리스가 깨어나면 대체 어떤 얼굴로 마주 하면 되는 걸까.
“…도련님?”
한심한 기분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 맑은 정신이 되돌아오자 이성적인 생각이 하나 둘 머릿속을 채워 갔다.
비가 그친 이상 사람들이 지나갈 만한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곳에 있는 이상 그저 체온만 떨어져갈 뿐이고, 구조를 해줄 사람도 오지 않을 터였다. 나는 보리스의 어깨에 손을 대고 살짝 흔들었다.
그대로 무너진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넘어지는 순간 다친 것일까.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비명소리 하나 없이 바닥으로 굴러 내리는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현실적이지 못하게 다가왔다.
“보리스!”
그대로 그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드리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손끝에 닿는 보리스의 몸이 무척이나 차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코끝에 손을 가져 대니 아주 옅게, 숨을 쉬고 있다는 걸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점점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곧이어 눈치 챘다. 주변의 색이 순식간에 백지로 변해 버리는 감각이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나는 이미 란즈미를 지켜 냈는걸. 나는 분명 할 수 있었을 텐데, 내 동생을 지켜냈던 것처럼 그를 지켜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보리스보다 강해. 분명 그를 구해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보리스, 보리스!”
이름을 부를게. 너의 이름을. 보리스 진네만이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를게. 네가 원한다면 평생 너의 곁에서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너의 이름을 불러 줄게.
이대로 가지마. 떠나지마. 나를 또 혼자 두지 마. 보리스.
눈물이 보리스의 볼에 떨어졌다. 방울방울 흘러 반복해 그의 위에 떨어져 내렸다. 가지 마, 가지 말아 줘. 나를 혼자 두지 마. 이제 와서 나에게 떠나라고 명령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옆에 있어달라고,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지에.”
그의 머리만을 끌어안고 찢어진 이마를 반복하여 소매로 닦아냈다. 멈춰. 제발 멈춰줘. 보리스를 아프게 하지 마. 보리스를―
“란지에!”
“아…….”
벨노어 저택의 사용인이었다. 흐릿한 눈으로는 누구인지까진 알 수 없지만 입고 있는 제복으로 대충 판단 할 수 있었다. 살았다. 살릴 수 있다. 어른이 있다면 보리스를 고쳐줄 의사 앞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살려주세요. 도련님, 도련님이 이대로면 죽어 버려요.”
“란지에…….”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의식과 몸이 맞물리지 않았다. 좀 더, 좀 더 설득력 있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전혀 다른 말이 튀어 나가버렸다. 당황한 사용인은 우물쭈물 기다리라고 하고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보리스의 상황은 한시가 급한데 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지금 당장 안아들어 옮긴다 해도 어찌 될지 모르는데, 왜.
“로젠크란츠.”
“…주인님.”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그 모습에 재빨리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끊어져 버린 것처럼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백작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그가 나를 지켜주는 무언가인 것처럼 느껴져 올 정도였다.
“잘했다. 정말로 고생이 많았구나.”
“주인님. 저는…….”
“수고했다. 너를 저택에서 내 쫓는 일은 없을 거다.”
그는 그렇게, 나를 현실로 되돌릴 말은 내뱉고는 내 품에서 보리스를 빼앗아 갔다. 작은 소년을 적당히 안아든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시야에서 금방 사라져 버렸다.
아주 느린 속도로 주변의 색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바위의 빛깔과 그 위에 얹어진 이끼의 색. 나무가 가진 둔탁한 색감과 그 위를 뒤덮는 눈부신 신록. 넓고 넓은 푸르른 하늘.
이제야 알았다. 네가 옆에 있으면 나는 너 이외의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아. 나의 감정을, 인정하게 되었다.
“란지에, 괜찮겠니? 혼자 걸을 수 있겠어?”
“예. 괜찮습니다.”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Our Farewell _ 란지보리 中 일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