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만에 엡작
건물 밖이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며칠간 연락이 끊겼던 D2중대의 인물들이 무사히 귀환한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넘어오는 환호성 소리에 에바리스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레지먼트의 출격이다. 부끄러운 표현이지만, 기실 대륙 최강의 칭호를 딴 사내들이 모여 있는 군대였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닥쳤어도 그들이 돌아오는 것은 응연히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굳이 저렇게 환호해가며 기뻐해야 할 사건인 것인가에 대한 것부터 그로서는 이해가지 않았다.
에바리스트는 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밖의 어리석은 인물들과 같이 쓸모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아이작. 아이작. 두 번의 호명에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자 그가 크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에, 에바.”
“수풀 뒤로 돌아가면 검역소로 몰래 들어 갈 수 있어. 얼굴 정돈 봐도 괜찮을 거야. 계속 걱정 하고 있었지?”
“알고 있었어?”
에바리스트는 대답 없이 아이작의 얼굴 앞에 손을 내밀었다. 어색한 미소의 소년이 친우의 내밀어진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새까만 머리의 소년은 빈손으로 미끄러져 내린 안경을 슬쩍 들어 고쳤다. 아이작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손을 잡고 어딘가로 자신을 데려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의 에바리스트라면 충분히 번거로워 했을 법한 일이었지만 다행이도 아이작에게만큼은 달랐다. 손을 마주 쥔 불안한 표정의 친우를 그는 당찬 걸음으로 인도했다.
작전 수행이 끝난 중대는, ‘검역’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검사를 받아야 했다. 훈련생인 그들로서는 그 과정의 필요성을 이해 할 수 없었지만, 그동안 중대와의 접촉이 중단된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작은 소년들은 조심스레 검역소 뒤의 수풀을 지나, 막사들이 모여 있는 캠프에 숨어들었다.
레지먼트의 임시 숙소는 무척이나 투박한 곳이었다. 어설프게 지어진 천막 덕에 작은 어린 아이들이 몸을 숨길만한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두 소년은 숨바꼭질을 하듯 막사의 그림자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아이작이 그리도 걱정하던 남자의 모습을 찾았다.
“교관님.”
에바리스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장신의 남자가 고개를 돌려 왔다. 두 소년의 모습을 발견한 그가 잠깐 곤란한 얼굴을 하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번엔 꽤나 걱정 끼쳤겠구나.”
“오랜만입니다.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보다시피 아주 멀쩡하지.”
남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아이작의 머리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짧은 금발이 손끝에 닿기도 직전, 그가 손을 멈췄다.
“내 얼굴 보러 온 거라면 이제 충분할 테니 빨리 돌아가. 검역소에 훈련생이 들어 왔단 이야기가 돌아서 좋을 것 하나 없어.”
“프리드리히.”
아이작이 자신의 머리끝에 닿아 있던 손을 양팔로 잡아 그대로 머리카락 위로 눌러 내렸다. 어린 아이의 머리카락이 프리드리히의 손가락에 감겨들었다. 그가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자, 소년의 눈에 들어찼던 눈물이 흘러 내렸다.
“많이 걱정했어?”
“…….”
“대답은?”
“…네. 굉장히.”
“굉장히? 그거 괜찮네!”
프리드리히의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정말로 걱정했어요.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큰소리로 울음을 토해냈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 다는 것은 언제나 두렵다. 그것을 두 소년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잃었던 것을 되찾은 것 마냥 프리드리히의 팔목을 세게 붙든 친우의 모습이 있었다. 에바리스트는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의 손이 비어있었다.
+++
에바리스트는 근처로 달려드는 몬스터를 발로 적당히 밀어내고는 총구를 겨눴다. 빗발치는 총성 속에 섞여 우악스러운 비명이 귓가를 메워 들었다. 이름 모를 동료의 것이었다.
발치에 떨어진 몬스터의 머리를 내려 보고는 혀를 찼다. 산양의 머리를 한 이족보행의 생명체. 작전 설명에선 존재치 않던 몬스터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이었다. 디 아이의 중심부는커녕, 외곽 지역의 끄트머리였을 뿐 이었다. 레지먼트가 이렇게 궁지에 몰리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계산 대로였다면 이곳은 디 아이 작전에 있어서는 상당히 안전한 지역에 속했다. 갓 훈련생을 벗어난 그들을 쓸모없이 희생 될 장소에 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저 중심부로 들어간 중대를 엄호하기 위해 배치 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돌아갈 발마저 묶여 버렸다. 그들이 타고 왔던 콜벳이 급작스럽게 운행을 멈춘 것이었다.
비명이 들릴 때마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혹여, 친우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 두려웠다. 그 사실이 무척이나 우습게 다가왔다. 똑같은 전우가 아니던가. 다른 동료들의 비명 소리가 자신에겐 그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 이 혼란 속에서도 거슬려 왔다.
“에바!”
에바리스트의 등 뒤로 내려쳐진 커다란 낫을 금발의 청년이 장검을 던져 빗겨냈다. 바닥에 박힌 낫을 뽑아내려는 몬스터의 미간 위로 에바리스트의 권총이 불꽃을 뿜어냈다.
“멍청하게 서 있다 저세상 가서 다 내 탓이라고 욕할 녀석 같으니.”
“구해줬잖아.”
“아, 나 없음 죽겠다- 그 소리냐고!”
“그렇지는 않지만.”
“너랑 이야기 하면 정말 기운 빠지거든.”
친우의 말투가 거칠게 변한 것은, 아마도 바로 이년 전의 그때 이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설프게 예의바른 소년의 어투가 마치 길거리의 잡배처럼 변해 버린 것이 무척이나 눈에 띄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와 닮아 있단 것도 눈치 채고 있었다.
“도망 칠 수 있다면 도망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사령관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
“난 사령관이 아니야.”
“슬슬 퇴각 명령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잖아.”
“아이작. 이런 이야기는 좀 더 진중한 말투로 상담하는 편이 좋겠어.”
“너야말로 이럴 때까지 그래야겠어?”
짜증나는 녀석! 아이작이 집어던졌던 검을 들어 뛰어든 늑대 형태의 몬스터의 목을 베어냈다. 흩어진 피가 금색의 머리카락 위에 쏟아져 내렸다. 흘러내린 피가 시야를 가려든 것인지 소매로 눈가를 닦아낸 그가 에바리스트를 향해 혀를 길쭉이 내밀었다.
“퇴각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모양이야.”
“무슨?”
“발이 묶였어.”
“맙소사. 다른 쪽도? 그래. 뭐, 네 일이니 물을 필요도 없지만-. 완전 절망적이네. 이대로 죽을 각오라도 하란 건가.”
“나를 살릴 각오로 해.”
“기력이 있다 못해 농담할 기운마저 남아도시니 다행이십니다! 아주!”
주변을 메우는 몬스터의 숫자는 줄어들기는 커녕 늘어나고만 있었다. 마치 소용돌이 코어 근처에 놓인 것만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군데군데서 진형을 이루고 있던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에바리스트와 등을 마주대고 서있던 아이작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나마 구원이 있다면, 언제나 그와 함께하던 인물들이 바닥에 늘어져 있진 않단 것 정도였다.
이대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전력도, 무기도 부족하다. 허리춤에 매두었던 탄창도 비어 버린 지 오래였다. 에바리스트는 등에 지고 있던 장총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몸이 무거워질 뿐이었다.
아이작의 농 섞인 이야기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죽음을 각오해야할지 모른다. 흑발의 청년이 먼지로 흐릿해진 안경에 인상을 찌푸렸다.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자. 단 두 사람의 목숨을 우선으로 여기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두 사람이 함께라면 어떻게든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아이작을 지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혼자보다는 두 사람이 나을 것이란 판단이 섰을 뿐이었다. 그는 훈련생 내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라면 이 곤란을 빠져나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작-.”
분명 그래야만 했다.
“…….”
고개를 돌린 곳에 당연하다는 듯 그가 있었다. 에바리스트를 감싸듯 팔을 내민 그가 있었다. 친우가 이름을 부르고 있음에도 그는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빗겨 막은 검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물이 들고 있던 긴 낫이 아이작의 목 곁으로 천천히도 박혀 들어갔다. 비명마저 눌러 참은 금발의 청년은 그제야 친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이라는 듯 새파란 눈동자에 친애해 마지않는 친구의 모습을 담고는 그대로 에바리스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고개를 내릴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없었다. 얼어붙은 에바리스트의 머리 위로 마물의 낫이 내리 꽂혀 들었다.
그제야 확신했다. 아이작 로스발드는 언제든, 어떤 방식이든- 이렇게 에바리스트 발트의 곁을 떠날 수 있었다.
+++
“영웅은 공주님을 구하고 함께 긴 시간을 모험한 동료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 거야.”
바람에 섞인 어린 아이의 웃음소리가 새파란 언덕 위를 스쳤다.
“공주님을 구했으니까, 에바는 왕이 되겠네?”
“물론이지.”
“그럼 나는?”
“당연히 내 옆에 있어! 기사님이 되서 나와 왕비를 지키는 거야.”
에바리스트가 근처의 나뭇가지를 주워 마치 허리춤에 맨 검을 뽑아 들 듯 손을 움직였다. 자, 이 앞에 앉아. 눈을 빛내며 마주 서 있던 작은 아이가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앞에 자리 잡았다.
“그대는 지금까지 나를 보좌하며 그 용맹을 증명해 왔다.”
“…….”
자못 진지한 목소리에 벽안의 꼬마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뜸을 들이던 새까만 머리카락의 소년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작은 아이의 어깨에 나뭇가지를 가져다 대었다.
“아이작 로스발드, 그대를 나의 기사로 임명한다.”
고개 숙였던 아이작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두 아이의 시선이 마주치자, 까르륵 웃음소리가 또 터져 나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푸른 풀밭 위에 몸을 던지듯 누워 자리 잡았다.
귓가를 간질이는 긴 잡초의 풋내도 청명한 하늘의 색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에바리스트는 손을 뻗어 아이작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망설임도 없이 금발의 작은 소년이 맞잡아왔다.
이곳일까. 여기서 부터일까.
아니다.
이곳이 아니다.
이곳을 바꿀 수는 없다. 없던 일로는 할 수 없다.
부모님을 잃은 것은 슬픈 일이다. 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도 슬픈 일이다. 하지만, 이때의 아이작은 지금의 아이작보다 더 쉽게 에바리스트의 곁을 떠날 수 있었다. 저때는 함께 한다기보다는 그저 옆에 있을 뿐인 관계였을 뿐이다. 이때로 돌아간다 해서 에바리스트 발트에게 나아질 상황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용돌이를 막을 순 없다. 어린 아이인 에바리스트로는 가족 모두를 데리고 그 상황을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 하다.
그렇다면, 에바리스트 발트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은 대체 무엇인가.
레지먼트가 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존재 할 수 없다. 어린 에바리스트 발트와 아이작 로스발드가 선택 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그 중 이상적이라면 가장 이상적일 선택이었다. 이 역시 번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디 아이 작전에 가지 않는 것도 생각에서 제외 되었다. 레지먼트 최후의 작전이다. 물러서는 것은 겁쟁이나 할 짓이다.
우선적으로 번복 할 일은 에바리스트 발트의 죽음이다. 그 다음은 아이작 로스발드의 죽음이다. 그 둘을 선택하지 않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남아야 한다. 죽음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우릴 원치 않는다하여도 상관없었다. 우리의 존재를 잊는다면, 잊지 못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역사에 새겨, 문자로 남겨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한다면. 어린 날의 꿈처럼 영웅이 되어, 왕이 되어-.
미래의 꿈을 꾼다. 나아갈 길을 보았다. 왕좌가 눈앞에 있었다. 사랑해마지 않는 아름다운 공주도 있었다.
에바리스트는 맞닿은 작은 손을 세게 쥐었다.
분명,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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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알았어…. 여기서 끝내자.”
아이작의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고개 숙인 그의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바닥으로 흘러 떨어져 내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틈으로 안대의 새까만 줄이 보였다. 디 아이가 남긴 흔적이었다.
슬픔에 차있는 친우를 앞에 두고 에바리스트에게 떠오른 것은 같은 슬픔도, 안타까움도 아니었다. 기시감이었다. 이 모습 역시 봤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디 아이에서 한 번 죽음을 맛보았을 때 흘러가던 환상 중 하나였다. 정확히 그때를 기억하진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에바리스트는 수많은 갈림길 목격했고, 가장 완벽한 답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아이작과 헤어지는 일이 있다 해도 과거의 자신이 선택했다면 그것은 옳은 길일 것이라 여겼다.
에바리스트 발트가 디 아이에서 선택한 가장 완벽한 길이다. 애초에 아이작 로스발드와 진실로 헤어질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더라도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어느 새 태양이 자취를 감춰 아이작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침대 곁의 작은 조명만이 어슴푸레 하게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지금 슬프더라도 괜찮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영웅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전설처럼,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에바리스트는 아이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번이고 내밀었던 손이었다. 때마다 마주 잡아 오던 그의 온기를 기억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절의 의미 마냥 양 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꾸벅 고개로 인사를 한번 하는 것이 다였다.
따스한 손길의 기억만큼, 비어버린 차가운 손 역시 기억에 있었다.
한 번은 레지먼트의 프리드리히 교관 앞에서.
한 번은 에바리스트가 사랑해야할 여인을 찾았을 때.
그리고 지금이 세 번째였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아이작은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에바리스트는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복도의 밝은 빛이 병실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문득,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결국 퇴원 하는 날까지 아이작을 만나지 못했다. 에바리스트는 병원을 나서며 보초를 서던 병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이작 로스발드 대위가 장기 휴가를 내고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었다.
자기 일로 돌아가라고 했더니-.
언제나 그런 녀석이다. 바로 옆에서 해야 할 일을 지정해 주지 않으면 쉽게 늘어져서는 게으름을 피워대고는 했다. 에바리스트는 혀를 차며 불러두었던 마차에 몸을 실었다. 아이작이 휴가에서 돌아오면 단단히 본인의 위치에 대해 일러두는 것이 좋을 것이었다.
에바리스트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오늘의 일정을 떠올렸다. 우선 관사에 돌아가 짐을 풀고, 입원으로 미뤄졌을 서면상의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긴 병원 생활이었다. 분명 만만치 않게 일이 밀려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굳어버린 몸을 풀 시간마저 제대로 주어지지 않을 것이 뻔했다. 이대로라면 아이작에게 또 핀잔을 들을 텐데. 한숨이 비어져 나오려는 것을 아랫입술을 닫아 멈춰 들었다. 전투에 관한 것은 아이작에게 맡기면 그만이었다.
아이작. 아이작. 아이작.
그 어떤 것을 떠올리더라도 결국 아이작 로스발드로 모든 생각이 마무리 되었다. 에바리스트라는 인물에게 있어 굳이 한 사람에게 묶여 있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너는 나를 떠났다. 겨우 말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옆자리를 떠났다. 그런 너를 나는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이건 무척이나 불합리한 일이다. 너는 그 언덕의 위에서부터 계속 그런 모습이었다. 너는 나보다 가족을 우선시 했고 어른들의 말을 따랐다. 그들이 모두 없어진 곳에서는 나만을 바라볼 것이라 믿었다. 너는 또 새로이 사랑할 사람들을 찾아냈다. 나를 지키고 잃은 눈동자마저도 그 자리에 내가 아닌 다른 레지먼트의 인물들이 있었다 해도 너는 같은 행동을 했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다. 너는 나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존재를 매번 만들어 내고는 했다. 그런데, 왜. 나는 너와 같은 것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일을 마무리 하면, 그녀를 보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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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거슬리는 둔탁한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 왔다. 비명 한 점 없는 추락이었다. 그 고요를 부수듯 따라온 소음이었다. 에바리스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대로 다시 눈앞의 상대를 주시했다. 테라스 뒤로 사라진 여인을 추모할 틈조차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바로 코앞에 존재 했다.
붉은 망토를 두른 화려한 남자는 레지먼트 시절의 동료였다. 유약한 성격의, 언제나 뒷켠에 서 있던 그런 눈에 잘 띄지 않는 인물이었다. 에바리스트는 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영웅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소년이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브레이즈. 에바리스트의 머릿속에 그의 이름이 이어 떠올랐다.
내 선택이 잘못 되었을 이유가 없다. 아이작이 곁을 떠난 것도, 그녀가 죽게 된 것도 분명 완벽한 선택하의 물건이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에바리스트가 디아이에서 보았던 수많은 미래는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에바리스트 발트는 분명, 자신이 본 가장 이상적인 미래를 그 순간 선택했다. 가족이 살아 있는 미래도, 아이작의 두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래도 아닌 바로 이 인생을 선택 했던 것이다. 그 결정에 잘못됨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너는 마음이 없는 인형이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방 안으로 붉은 그림자가 물들기 시작했다. 한참 전 들려온 폭발음에 생긴 화재가 그들이 있는 층까지 번져온 모양이었다. 매캐한 연기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언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브레이즈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흐렸다. 칼을 마주 했건만 제대로 된 기억이 없었다. 새까만 제복의 청년은 그저 무언가에 홀린 듯 소리치고, 또 검을 휘둘렀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그의 검이 에바리스트의 가슴팍에 깊게 박혀들어 있었다. 그 순간 눈치 챘다. 에바리스트 발트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작이 곁에 없었다. 네가 있었다면, 나는 분명 괜찮았다. 네가 말 한 것처럼, 두 사람이 함께라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한 나라의 영웅이 되어, 왕이 될 수도 있었다. 역사에 이름을 새겨 신처럼 추앙 받을 수도 있었다.
그로서는 이해 할 수 없었다. 겨우 이렇게 끝나는 인생이라면 대체 그 순간의 에바리스트 발트는 이 삶에서 무엇을 얻기 위해 아이작의 한 쪽 눈을 희생해 가며까지 이 운명을 선택했는가.
환청처럼, 아이작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에바리스트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쫓았다. 피투성이가 된 금발의 청년이 슬픔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 곳에 서있었다.
발코니를 등진 금발의 청년이 느린 걸음으로 에바리스트의 앞으로 걸어 왔다. 느긋한 모습은 아니었다. 주저함, 떨림. 그런 것이 느껴지는 걸음 걸이였다. 문득 에바리스트는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아냈다. 마치 그의 움직임이 어린 시절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작.”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이작 로스발드의 하나 뿐인 눈동자 한가득 에바리스트 발트만이 담겨 있었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가득 찬 눈물 속에도 그저 단 한명의 인물이 그득할 뿐이었다.
내 선택은 분명 최선의 것이었다.
아이작 로스발드를 사랑하는 에바리스트 발트의 선택이었다. 영웅의 삶도, 그 무엇도 아닌-.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소년이 선택했던 삶. 분명 에바리스트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가족을 잃었다. 새로 얻은 존경하고, 또 믿을 수 있는 동료를 잃었다. 빛나던 너의 눈동자마저도 하나를 짓눌리게 만들었다. 너를 사랑하던 에바리스트마저 새로운 사랑으로 덮어 씌워 사라지게 만들었다. 결국, 너를 곁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최후엔 에바리스트 발트의 생명마저 이른 나이에 끊어 버리게 되었다.
얼마나 얻을 것이 없는 허무한 인생인가. 영웅은커녕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도 부족했다. 이것이 가장 완벽한 삶이라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에바리스트는 그 질문에 대해 거침없이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었다.
에바리스트의 손끝에 닿은 아이작의 손이 죽음의 틈에서도 차가웠다. 그것을 최후의 힘을 다해 강하게 쥐어 자신의 가슴에 끌어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보였던 아이작 로스발드의 얼굴은 비명과 절망으로 가득했다.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 없이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는 너를 손에 넣었다.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이 번져들었다.
만화 원고를 글로 옮겨 쓴거라ㅠㅠㅠ 템포가 이상해서 종이로 뽑기도 아까워서 웹공개 이케이케...는
퇴고...는 뭐 올려 놓고 언젠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