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쥬] The Hero 01
요한 안데르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는 집합 그 자체였다. 소년의 세계를 이끌어가고 만들어 주는 것이 그의 가족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란 단어는 그에게 세계를 이루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가족에 대한 정의는 남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에게 있어 가족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나, 같은 피를 가진 형제뿐만 아니라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일련의 집단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었다.
그에게 가족이란 이름을 부여 받은 존재들은 언제나 그의 옆에 있었다. 오히려 진짜 피를 나눈 가족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요한의 옆에서 함께해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그가 새로운 힘을 손에 넣을 때마다 하나씩 늘어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집단’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단체가 되어 있었다. 요한은 그들과 함께 지내는 생활에 만족하여 가족 이외의 외부와의 접촉이 점점 줄어들어만 갔다. 그렇게 그의 세계는 완성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당연하게 함께해오던 그들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너무나도 이질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그를 특이한 성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규정하여 특별 취급-, 정확히는 정신적인 병력이 있는 것으로 결론짓는 일은 그가 철이 들고 나서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그에게는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은 일이었다. 철이 든 그 순간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너무나도 당연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폐쇄적인 세계에 이변이 찾아온 것은 그가 13세를 맞이하게 되던 해의 일이었다.
The Hero*
01
“요한!”
손바닥에서 놀고 있던 작은 생물체가 한 바퀴 가볍게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부른 사람을 향해 고개만을 돌려 시선을 맞췄다. 잔뜩 화가 난 얼굴의 누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요한은 그녀가 화가 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소년은 한숨을 쉬며 바닥에 떨어진 조그마한 솜뭉치를 손으로 밀어 자신의 덱 케이스 위에 올라가도록 종용했다. 요한의 손을 따라 덱 케이스 위로 올라간 녀석이 고개를 까닥이며 요한의 이름을 불러왔다. 요한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잊지 않았어.”
요한의 느긋한 미소에도 불구하고 누이의 표정은 굳어만 갈 뿐이었다. 그는 가볍게 누이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와 짧게 눈인사를 했다. 블랙 매지션. 듀얼 킹 무토 유우기를 존경하는 그녀가 메인으로 사용하는 몬스터였다. 눈이 마주친 남자는 약간 어색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블랙 매지션 들은 언제나 저런 식으로 무뚝뚝한 녀석 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저 블랙 매지션은 말이 없는 편이었다. 요한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듀얼 아카데미아의 입학식이지.”
“그래, 그런데 왜 이런 아무것도 없는 방바닥에서 혼자 있는 건데?”
“언제나 모두가 곁에 있는 걸.”
그가 어깨를 들어 올리며 과장되게 의문을 표현했다. 다시금 블랙 매지션 쪽을 바라보며 볼을 부풀렸다. 그가 조금이라도 누나와 닿으려 노력한다면 이렇게까지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누이는 유난히도 카드와의 교류가 약한 편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네가 원하는 대로 초등교육은 집에서 마쳤잖아. 이것도 다 널 위해서야. 아무리 네가…….”
“정신병 환자의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
“요한!”
소녀의 높은 목소리가 귓가를 윙윙 울렸다. 어쩌면 이렇게도 목소리가 큰 걸까. 요한은 누이가 또 소리를 질러야할 만한 말을 맘속으로만 읊조리며 손을 들어 양 귀를 가렸다. 하는 김에 눈도 감으려는 차에 무척이나 불편한 얼굴의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블랙 매지션. 네가 그렇게 기분 나빠 해봤자 바뀌는 게 뭐가 있겠어.
“누나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그 정도도 모를 정도의 바보는 아니니까.”
“…….”
“하지만 내 눈에 카드에 깃든 이가 보이는 건 사실이야. 그건 변하지 않고, 또 모르는 척 하고 싶지도 않아. 카드에 깃든 영혼이 보이는 이상 마구잡이로 카드가 버려지고 또 선택 되는 듀얼 아카데미아 따위에 가고 싶지 않아.”
요한의 감은 눈 뒤로 빙글 빙글 자신의 카드들이 돌아갔다. 우연의 힘으로 만난 가족들이 눈앞에 하나 둘 떠올랐다. 그들이 만약 다른 사람의 손에 갔었더라면, 뒷전 취급 받아 어두운 케이스 안에 갇혀 지내거나 혹은 쓰레기가 되어 버려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요한은 알고 있었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선택을 해야 한다. 카드를 선별하는 능력은 듀얼리스트로서 당연히 정진해야할 덕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가족을 선별해 내고 등급을 나누어 처분한다는 것이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쓰레기가 되어 있을 정령을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끼쳐왔다. 요한 안데르센에게 있어 듀얼리스트라는 직업은 도살자에 가까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평범한 학교라면 갈게.”
“거기라고 듀얼리스트가 없겠어? 바보 같은 소리 마. 그리고 그런 학교에서 듀얼리스트로 성장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피해 다닐 수는 있겠지. 내가 듀얼리스트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건 누나의 착각이야. 나는 카드들을 위해서 듀얼 하는 거지, 듀얼리스트가 되기 위해 듀얼을 하는 게 아냐. 사실 듀얼 같은 거, 정말 싫어.”
조그맣게 혀를 내밀고는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넘겼다. 이미 화가 난 그녀가 이대로 일을 끝낼 리는 없지만, 조금이나마 무거운 공기를 덜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가늘게 뜬 눈 앞엔 화가 난 누이보다 먼저 불편한 얼굴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이가 블랙 매지션을 손에 넣은 뒤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요한 안데르센. 당신은 무언가 착각하고 있습니다.」
분명 누이가 그의 뒤에서 말하고 있음에도 나직하게 말하는 블랙 매지션의 목소리 쪽이 훨씬 더 깊게 그의 맘속에 박혀 들었다.
「아, 모쪼록 대답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나의 마스터는 당신이 나를 볼 수 있단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 말에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본다면 무척이나 힘들어 할 겁니다. 그 정도의 분별은 하실 수 있는 나이가 되셨을 거라 믿겠습니다.」
블랙 매지션의 말에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 나갔다. 요한은 바닥으로 고개를 내리고는 입을 비죽였다. 확실히 보이고, 확실히 들린다. 그것을 티내지 말고 일방적으로 들어 달라는 말은 너무나도 이기적이다. 양탄자로 된 바닥을 발로 가볍게 문질렀다. 불만 가득한 요한의 행동에 반응을 보인 것은 누이 쪽이었다. 그녀는 찌푸린 얼굴로 요한을 품으로 끌어안아 들었다.
“요한, 누나 이야기 잘 들어.”
「당신은 카드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내가 당신의 정령이라면 이런 행동을 용납하거나 하진 않았을 겁니다.」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아련하게 들려 왔다. 누나의 목소리도, 블랙 매지션의 목소리도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는 것임이 틀림없는데도 그 울림은 마치 벽을 하나 두고 듣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너는 좀 더 많은 것을 배워야해. 듀얼도, 카드도 아닌 그 이상의 것을 배워야 할 나이가 되어 가는 거야.”
「당신의 정령들은 당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단순히 듀얼에서 승리 하는 것뿐입니까? 만약 그 바람에 당신에 대한 존중이 들어 있지 않다면…….」
누나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기며 요한은 검은 옷의 남자를 그대로 투과해 지나갔다. 이렇게나 확실하게 보이는데도 닿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까지 모두에게 정령의 존재를 인식시키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다. 요한은 한숨을 쉬며 누나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음에도 따스함을 지니는 것은 살아 있는 가족 쪽이었다.
“나는 네가 좀 더 어른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
「그 정령들은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쪽이었든, 그에게 현실로 와 닿지 않는 말이었다. 요한은 결국 누나의 기세에 듀얼 아카데미아에 갈 것을 약속했다. 입학식은 가지 않았지만 정식으로 수업이 시작 될 때에는 참석 할 것을 다짐 했다. 요한이 몇 번이고 자신의 눈을 보고 약속 할 때까지 떠나지 않던 그녀는 결국 눈물마저 고인 얼굴로 방을 떠났다. 그런 누이의 등을 달래듯 블랙 매지션이 뒤를 따라 사라졌다. 그는 방을 나서며 잊지 않고 예의 바르게 몸을 숙여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누이의 체온이 사라지고 나자 서늘한 바람이 창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요한의 방은 비나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창이 열려 있었다. 햇볕에 장시간 노출된 덕에 약간 변색 된 커튼이 매일 같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요한의 창은 꽤 많은 숫자의 정령들이 드나드는 정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정령들에게 창문이 열리고 닫히는 일 따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요한의 눈에 그것이 편해 보였기에 열어 둔 것뿐이었다. 요한은 언제나처럼 노곤하게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정령들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이와 블랙 매지션을 불편해 하는 시끄러운 녀석들이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돌아갔어? 돌아갔어?」
「없으니까, 돌아간 게 틀림없어!」
「요한, 요한. 그 녀석들 다신 안 오게 할 수는 없어?」
요한은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는 정령들을 훑어보았다. 알아보기 쉬운 것으로는 사람의 형태를 취한 녀석들부터 동물의 형태, 곤충, 또는 사물의 모습을 한 녀석들도 종종 있었다. 통일감 없이 주변을 메워 든 녀석들이 각자 떠드는 것을 보며 요한은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그 정령들은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우연이라 하지만 그들은 한 가족이 되었고, 다신 떨어질 수 없이 소중한 존재들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정령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령은 정령일 뿐이고, 요한 안데르센은 요한 안데르센이었다.
「요한은 그 여자가 오면 언제나 피곤해 하는 걸.」
「맞아. 그 날은 듀얼도 해주지 않잖아.」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들을 우선시하여 나는 무언가를 잊고 있던 것은 아닐까. 요한은 감은 눈을 뜨고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았다. 요한을 사이에 둔 채로 자기네들끼리 무언가를 떠드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중의 하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시작을 한건 분명 무리 중 하나였건만 마치 그것이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된 것 마냥 하나같이 입을 열어 외쳤다.
「요한! 정말 오늘은 듀얼 하지 않는 거야?」
「순서대로라면 오늘은 내가 나갈 차례였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는 그저께에도 덱에 들어갔었잖아. 요한! 요한! 오늘은 날 써줄 거지?」
「잠깐! 난 그날 소환 되지 않았었으니까 무효야!」
인상을 찌푸린 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 같이 듀얼을 하지 않으려 하는 날이면 그들은 한층 더 시끄러워 졌다. 가끔 인간의 말을 할 수 없는 녀석들까지 끼어들어 종국엔 무슨 소리인지 모를 소음으로 뒤섞여버린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고 소음을 자장가 삼아 잠들었겠지만 오늘은 유난히 그들의 말들이 하나씩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침전되어 갔다.
「요한, 듀얼이 싫다는 건 무슨 말이야?」
「듀얼을 싫어하면 안 돼! 아직 난 소환되어 본 적도 없다고.」
「듀얼리스트가 되어줘, 요한!」
그건 누굴 위해서야? 목 끝까지 올라오던 말을 참고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카드 케이스 쪽으로 향했다. 정확하게 한 상자를 채우던 날, 요한은 더 이상의 카드 수집을 그만 두었다. 다른 사람들과 제대로 된 듀얼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소스였지만 더 이상의 정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요한으로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상자의 끝까지 가득 찬 카드들을 손끝으로 쓸었다. 익숙한 감촉에 마음이 안정 되어갔다.
「요한!」
「요한!」
「대답해 요한!」
재잘 거리는 소리들이 하나의 단어로 모아져 갔다. 각자의 말들이 하나로 모여 내린 결론은 ‘요한’이라는 소년의 이름뿐이었다. 그들이 누구를 위해서 외치고 있는 가라고 묻는다면 정령들은 자신들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소년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 속에는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요한 안데르센이라는 작은 남자아이 본인이었다.
「요한!」
요한은 카드 케이스를 집어 그대로 그것을 창문으로 내던졌다. 창문틀에 거칠게 부딪친 케이스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밖으로 넘어갔다. 검은 색의 케이스가 시야를 벗어나자 요한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그림자들이 급작스럽게 사라졌다. 방 안을 가득 채우던 요한을 부르던 이름소리 마저도 그것이 있었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부서졌다.
“시끄러워.”
듀얼은 좋아하지 않는다. 패배한 사람도 즐거운 것이 듀얼이라고 하지만 언제나 그런 듀얼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승리의 기쁨을 알기에 승부한다. 그 결과가 패배였을 때, 인간은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듀얼에 관심이 없던 요한마저도 승부해서 패했을 때에는 분한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 그것에 목숨을 걸고 임하는 사람들에겐 패배가 얼마나 아프게 다가올 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패배를 느낄 틈조차 없었다. 어린 자신에게 한 두수 물러 주는 것이 예의처럼 여겨졌었고, 동갑내기들 사이에서는 요한 안데르센의 재능을 이길만한 덱을 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요한이 배운 것은 카드에는 결국 상하가 있고, 어떤 덱을 짜게 되더라도 종국은 필요에 의해 쓰이지 않는 여분의 카드를 만들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의 경우 그런 카드는 내어 버리면 되었지만 요한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는 정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요한에겐 카드는 살아 있는 존재였다. 둘도 없는 가족이었다.
결국 요한은 자신의 카드 케이스가 하나 차는 것을 끝으로 카드를 구입하는 것을 그만뒀다. 그것은 결국, 요한 안데르센이라는 듀얼리스트는 새로운 전술을 발전 시켜 나갈 여지를 끊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음의 아픔도, 현실적인 문제도 모든 것이 그에게서 듀얼이라는 존재를 멀어지게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가 카드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정령들이 그에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정령들에게 중요한 사실이 되지 못한다면 요한에겐 더 이상 듀얼은 필요치 않았다. 카드조차 알 바가 아니었다.
“…….”
지금까지 난 너희를 위해 이렇게나 노력해 왔는데. 요한 안데르센의 의지를 뒤로 한 채 가족들을 위하여 살아 왔다. 짧은 생이지만 그것을 운명으로 여겨 단 한 조각의 불만조차 가지지 않았었다. 그것이 이제와 우습게 느껴졌다.
요한.
창문 밑으로 내던져진 정령 중 하나가 큰 목소리를 내어 자신을 부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요한은 느린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가 몸을 내밀었다.
새파랗게 순이 돋은 잔디 밭 위로 햇살이 노랗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여과 없이 떨어진 햇살이 담장 위에서 부서져 내렸다. 요한은 자신의 눈앞을 가리려 드는 색 바랜 커튼을 치워 옆으로 밀어냈다. 어느 새 따스해진 봄의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그는 바람에 묻어난 소리에 귀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요한, 요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감았던 눈을 살며시 들어 올리자 보이는 것은 그의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모두가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하나같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요한은 어설픈 한숨을 쉬고는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 장이라도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잔디 밭 위에 흩어진 카드를 보며 문득 요한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어때? 버려 진다고 생각하니까 무섭지?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으라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들에게 큰소리를 치고는 싱긋 웃었다. 밝은 목소리가 조용한 정원 한가득 울려 퍼졌다. 기묘한 고요가 층을 넘어 올라왔다. 요한의 눈에 보이는 그들은 분명 입을 벙긋 거리며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귀에 닿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다들 왜 그래?”
몸을 숙여 그들에게 조금 더 다가가자 풀잎이 스치는 소리인지, 입술이 스치는 소리인지 모를 옅은 소리가 들려 왔다. 손을 뻗어 봤자 닿지 않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한은 몸을 크게 숙였다. 조금 만 더, 조금 만 더.
요한의 몸이 점점 밑으로 크게 빠져 나왔다. 겨우겨우 손끝으로 버텨낼 만큼 몸을 내밀었을 때에야 그들의 입이 무엇을 말하는지 읽어 낼 수 있었다. 요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소리로 빠져 나오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제 너는 필요 없어.
정령들의 눈동자가 빙글, 한 바퀴 돌아 요한에게 다시 돌아왔다. 창틀을 붙잡고 있던 요한의 손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나 손을 내밀어도 닿을 수 없던 그들에게 요한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02_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에 섞여 든 소음은 찻길에서나 들을 법한 싸늘한 음색이 실려 있었다. 흐리게 보이는 하늘은 구름이 낀 것 마냥 흐릿해서 별도, 심지어는 달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철망으로 가려진 담 밑으로 다홍빛의 빛이 너울 거렸다. 불규칙적인 빛의 움직임에 철망의 그림자가 물결치듯 흔들렸다. 소년은 눈꺼풀 위로 떨어지는 그림자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소년의 눈동자가 흐린 하늘을 담게 되었을 즈음에는 어느 새 구름이 흩어진 것인지 크게 휜 달이 그의 위로 빛을 떨어뜨려 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넓은 공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팔을 조금 뻗자 바로 바닥에 닿아왔다. 차가운 석재의 감촉이었다.
“일어났다!”
바닥에 흩어 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작은 손이 있었다. 이내 그 손이 자연스레 볼을 타고 올라오더니 가볍게 감싸 쥐었다. 소년은 손의 주인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갈색의 머리카락이 담 너머의 붉은 빛에 물들어 다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짙은 색의 눈동자 한가득 자신의 얼굴이 들어차 있었다. 어린아이였다. 소년과 대여섯 살은 차이가 날 것 같은 조그마한 남자아이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커다란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소년의 볼 위로 떨어져 흩어졌다.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울고 있는 걸까. 소년은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와 끌어안았다.
“천사인거야?”
천천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년이 말했다. 아이가 몸을 일으켜 소년의 위로 올라타듯 기어 올라왔다. 얼굴을 마주한 꼬마 아이가 여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입을 열었다.
“정령은 형이잖아?”
“응?”
“형은 정령이잖아? 쥬다이가 쓸쓸해 하니까, 이젠 내 앞에 나타나 준 거잖아?”
소년은 아이의 이름을 곱씹어 불렀다. 쥬다이. 자신의 이름을 불리자 아이가 기세 좋게 소년의 품에 안겼다.
등에 닿는 차가운 감촉과는 달리 아이의 체온은 너무나도 따스했다. 소년은 아이의 허리를 감아 안고 옅게 웃었다. 그의 미소에 아이가 통통한 볼 한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왜 정령이야?”
“달님에게 소원을 빌었더니 나타났는걸.”
“내가?”
“응! 갑자기 막 하늘에서 떨어졌어. 너무 높은데서 내려왔던 건가봐? 엄청 엄청 오래 자고 있었어. 뭐야, 형. 나 보러 온 거 아니고 잘못해서 떨어진 거야? 왜 그런 거 물어봐?”
가슴팍에 매달려 있던 아이가 입을 비죽였다. 작게 뛰는 심장 소리가 몸을 타고 전해 내려오는 감촉이 기분 좋아 소년은 아이를 품 한가득 끌어안았다.
“3층에서 떨어졌어.”
“진짜?”
“응. 우리 집 4층까지 있거든.”
아이의 커다란 눈에 여유로운 소년의 얼굴이 한가득 그려졌다. 소년의 여유와는 반대로 아이의 볼엔 불만이라는 감정만이 그득히 차올랐다.
“형은 이름이 뭐야?”
“아. 너는 쥬다이지?”
“형은 이름이 뭐냐고!”
“음.”
소년은 아이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고는 그대로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위로 들어 올렸다. 조금 끌어 당겨 다시 안아 들자 이번에는 표정은 보이지 않는 채로 몸이 겹쳐 들었다. 아이의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크게 울렸다.
“그러니까! 형 이름!”
“요한.”
“요한?”
“응. 요한.”
“이상하다. 내 카드엔 그런 이름 없는데.”
꼬마 아이가 그대로 몸을 일으켜 무릎을 털었다. 일어나는 걸 도와주겠다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요한은 그 손을 가볍게 쥐고 위 아래로 흔들었다 그대로 놓아 버렸다. 아무리 몸집이 작은 요한이라도 쥬다이가 견디기엔 무리가 있었다. 쥬다이는 볼을 불리고는 삐진 것 마냥 고개를 홱 돌렸다. 요한은 피식 웃으며 묵직한 몸을 일으켰다. 멍했던 눈앞이 슬그머니 맑아져왔다. 그 순간 별 밤을 가리고 있던 그림자가 꿈틀 움직였다. 요한은 그 이질적인 움직임에 시선을 하늘로 옮기고는 그대로 탄성을 내질렀다. 상상치도 못한 광경이 그의 눈앞에 그려져 있었다.
건물 전체를 뒤 덮는 그림자가 느릿느릿 옮겨졌다. 살며시 달을 가려들었다가 펼쳤다가를 반복하며 자신의 거대한 몸을 건물 위로 뉘었다. 너무나도 거대해서, 도저히 전체적인 모습을 가늠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존재가 정령인 것은 틀림없었다. 달빛이 미미하게 그 모습을 투과하여 차가운 바닥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상상속의 동물과 비슷한 형태를 지녔다는 것을 깨달은 건 한참의 시간이 걸린 후였다. 단단한 비늘로 이뤄진 몸. 육중해 보이는 동체. 길게 늘어뜨려진 피막의 날개. 거대한 동체에 여럿달린 길쭉한 무언가는 어두운 밤의 시야엔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로 이어지는 목으로 추정 되었다. 요한은 눈을 찌푸려 목 위를 확인하려 하였지만 그리 쉽지 않았다. 밤의 달빛이 가루가 되어 비늘 위에 얹어져 그것의 그로테스크한 몸체 위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드래곤이라는 건 정말 우아한 생물이구나. 요한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느린 속도로 움직이던 드래곤의 한쪽이 슬며시 움직여 고개를 내렸다. 머리로 보이는 것이 천천히 내려와 아이의 옆에 내려앉았다.
“쥬다이!”
“응.”
“저, 그.”
아이에게 정령이 보이지 않을 것을 깨닫고 조용히 팔을 잡아끌어 안았다. 정령은 인간에게 닿지 못한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크기 자체가 너무나도 위협적이어서 요한은 쥬다이의 어깨를 힘을 주어 세게 눌러 잡았다.
눈앞으로 내려온 머리는 상상 이상으로 커다랬다. 그것은 1층 건물 정도 되는 높이에서 멈춰 서더니 슬쩍 자신의 고개를 돌려 커다란 눈동자만을 그의 곁으로 들이 밀었다. 호박색의 눈동자가 아몬드 모양의 동공을 좁히며 다가섰다. 검은 동공에 비추인 요한의 얼굴엔 기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두려움인지, 반가움인지 모를 어색한 얼굴이었다.
“아파. 형.”
“미안. 잠깐만 이러고 있자.”
요한은 입술을 깨물고는 그대로 드래곤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방금 전까지 느껴지지 않던 악의가, 너무나도 선연하게 요한의 전신을 감싸왔다. 쥬다이 역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요한의 품으로 파고들며 작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넌 누구지?”
「넌 누구지?」
기묘한 목소리였다. 두개의 머리가 동시에 입을 벌려 소리를 내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무언가, 철이 긁히는 것 같은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높은 음색과 귀에 닿지도 않을 것 같은 저음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역시 정령의 소리였다. 의미만은 요한에게 확실히 느껴져 왔다.
품에 안은 쥬다이의 체온에 용기를 얻어, 요한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내 말을 따라하는 거야?”
「너는 내가 보이는 건가.」
“너 설마 이 아이의 몬스터야?”
「…네가 말하는 것이 쥬다이라면, 그 말은 옳은 거겠지.」
“헤에. 멋있네. 분위기 있는 걸. 내 가족들과는 천지 차이야. 아아, 블랙 매지션하고는 닮았을지도.”
짧은 칭찬의 탓일까, 조금은 그―그녀일지도 모를 이―의 악의가 옅어졌다. 요한은 마른 침을 삼키며 쥬다이를 조금 더 품으로 끌어안았다. 꼬마 아이는 무슨 생각인지 허공을 보며 이야기하는 요한을 물끄러미 올려보고 있었다.
「나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어.」
“아.”
「다시 한 번 묻지. 너는 누구지?」
“요한.”
「요한?」
급격히 동공이 얇게 줄어들었다. 홍채의 주름이 세게 꿈틀거리더니 팽팽이 당겨져 왔다. 평소라면 보이지 않았을 움직임마저 세세히 보일 정도로 거대한 머리가 목을 울리는 그르륵 대는 소리를 냈다.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거대한 소리였다.
“요한 안데르센이야.”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대는 동시에 드래곤은 커다랗게 웃는 소리 같은 것을 내었다. 귓가를 긁어대던 거북한 소리가 한 순간에 잦아 들었다. 요한을 바라보는 드래곤의 눈동자가 웃는 것처럼 살짝 휘어졌다.
「무능한 기사가 소원을 이룬 모양이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의 품에 안긴 내 사람을 풀어줘라. 너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이해는 어디까지나 이해일 뿐. 그 사람은 나의 것이다.」
“이봐!”
요한의 커다란 목소리에 용은 한숨을 쉬는 듯 한 소리를 냈다. 긴 소리 안에 묘한 아련함을 느끼게 하는 소리였다.
「안데르센 경, 전하를 이쪽으로 보내주십시오.」
안데르센 경. 느닷없는 경칭과 존댓말에 요한은 자신도 모르게 쥬다이를 안고 있던 손을 놓았다. 존댓말을 쓰는 목소리가 기분 나쁜 높은 옥타브의 소리도, 듣기 힘들만치 낮은 소리도 아닌 평이한 소년의 목소리였다는 것은 눈치 채지 못한 채였다.
쥬다이는 자신을 붙잡고 있던 손이 놓아지자 두어 걸음 앞으로 뛰어 나갔다. 거대한 드래곤의 머리 앞에 서서는 그가 요한에게 고개를 돌렸다.
“요한 형. 있잖아.”
“쥬다이. 어, 그러니까 지금은…….”
“위벨이 있는 거지?”
어둔 밤을 빛내는 듯 아이의 얼굴에 밝은 꽃이 피어났다. 해사하게 웃으며 이 곳 저 곳을 둘러보는 얼굴엔 반가움만이 가득했다. 방금 전의 악의 가득 찬 드래곤의 기척을 느꼈던 것이 분명함에도 쥬다이는 자신의 정령이 곁에 있단 생각에 정신이 팔린 모양이었다. 요한은 한숨을 내쉬고는 쥬다이의 말에 답했다.
“위벨?”
“응. 내 에이스 몬스터야.”
“드래곤의 모습을 하고 있어?”
“에에?”
“아닌 거야? 하지만 정령은, 확실하게 네 몬스터라고 했어.”
“으응, 이상하네. 위벨은 사람 모습인 걸. 날개가 달렸지만 사람이야.”
요한이 눈만을 굴려 드래곤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요한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씩 웃었다.
“위벨?”
「함부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
“위벨 맞네. 왜 그런 모습인거야?”
「어떤 모습이든 너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위벨의 목소리가 원래의 갈라진 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위벨의 거대한 머리가 하늘 높이로 다시 사라져 갔다. 흐릿해진 머리가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렸다. 건물을 쥐고 있는 거대한 발톱이 세게 벽을 쥐었다. 만약 실존했다면 이 건물 정도는 가볍게 무너트렸을 법한 크기였다.
요한의 머리 위로 하늘을 울리는 소리가 내려앉았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소소한 잔소리였다.
「쥬다이가 감기가 들지도 모르니 어서 들어가라.」
“아아, 응.”
「…….」
요한은 쥬다이의 손에 이끌려 건물 한 가운데 선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요한은 건물 안에 들어가면서도 거대한 정령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정령은 발 끝 부터 천천히, 모습을 지워 나갔다.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정령의 동체가 건물 위에서 빠른 속도로 지워져 나갔다.
「…그렇군, 이제야 나타난 것 쪽이 이상한 일이지.」
거대한 모습이 지워진 빈 옥상에 낮은 목소리만이 남겨졌다.
냅두면 영원히 안쓸 거 같아서 비정기적으로 업데이트 됩니다.
고쳐서 올리려고 했는데 그러려고 하니까 더더욱 영원히 안올릴 듯 하여...(피눈물
커플링은 요한X쥬다이
패러렐 세계관인지 원작 기반인지 결국은 패러렐입니다b